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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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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만큼 불운한 사람도 없고, 운좋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 그는 운명을 개척한 사람이요 환경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총애로 인하여 형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들에 의해 죽을 뻔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형들의 처음 계획은 요셉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는데 르우벤이 청하여 목숨만은 살려두기로 하고 광야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다행이도 그 구덩이엔 물이 없었습니다. 곧이어 유다가 나서서 이렇게 두지 말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대상들에게 팔기를 간청하여 다른 형제들이 그 말에 응했던 것입니다(창 37:12-28). 이 대상들은 미디안 사람들이었는데 애굽에 내려가서는 역시 돈을 받고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습니다.
요셉의 운명은 어느 각본에 짜여진 연극처럼 한막 한막이 진행되어 갔습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아버지의 사랑에서 고독하고 처량한 신세가 됐습니다. 사람은 고독할 때 그 사람의 사람됨이 잘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남을 윈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타의에 의해서 넘겨지는 각본 속의 요셉은 한 번도 원망하질 않습니다.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도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형들을 살리려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내 아버지와 형들의 흉년을 면케 하기 위하여 보내셨다” 그래서 못된 형들로 하여금 고개를 못들고 울게 했던 것입니다(창 45:1-15)
요셉의 입지전은 무엇입니까? 그는 숱한 유혹과 모함과 고독이라는 환경을 무릅쓰고 진실히 행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요셉은 근면과 성실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성실한 사람은 어딜 가나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요셉이 가는 곳에는 형통함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또한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됩니다. 많은 큰 인물들이 유혹에 빠져서 인생을 그릇친 사람이 많습니다. 삼손도 다윗도 그랫고 솔로몬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든지 계시며 항상 인도하시는 것을 요셉은 믿고 따랐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만 일관했습니다. 모함을 해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애굽의 총리대신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성공하려면 환경에 잘 적응하고 항상 어디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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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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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에 감자 농장을 경영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주인은 몇 사람의 인부를 고용해서 대(大), 중(中), 소(小) 크기의 감자를 고르게 하였습니다. 며칠 후 인부들이 매우 지친 모습으로 농장 주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도저히 이 일만은 못하겠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얼마나 힘이 드냐고 물었더니, 너무 힘이 들어서 체중도 줄고 머리도 아파 도저히 일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이없게 생각한 농장 주인은 그 일이 그렇게 어렵냐고 다시 물었더니, 고용인들이 “일 자체는 힘이 별로 안드는데 감자의 크기를 결정짓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듭니다”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는데, 그 결정이 여간 어렵질 않는 것입니다. 간단한 선물을 하나 하려고 할 때에도 선물을 고르기는 것 때문에 아주 신경을 써본 경험이 누구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도 골머리를 썩는가 하면, 때로는 타인이나 자신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일에서는 쉽게 결정을 내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문제에 접하여 이것을 택할까, 저것을 택할까 고민할 때, 누구와 의논하고 누구의 자문을 받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충고를 구하지만, 사람들의 의견 역시 다르고 다양하기 때문에 더욱 혼선을 줍니다. 그럴 때는 차라리 머리가 좀 더 둔하다면 오히려 쉽게 결정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동물은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쉽게 행동합니다. 새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복잡한 자기 둥지를 만들거나 찾아가고 바다와 육지를 건너야 하는 긴 여행에서도 자신들의 갈 길을 틀림없이 잘 찾아 갑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추리를 할 수 있는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수를 저지르고 그리고는 ‘내가 왜 이렇게 바보같은 짓을 했지?’하고 자신을 질책할 때가 있습니다. 불분명한 선택, 우유부단한 태도는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분명하고 확고한 결정을 내리는데 과감할 수 있는 삶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을까?
결정은 언제나 미래와 연관됩니다. 이 결정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잘 모르기 때문에 결정이 어려운 것입니다. 미래를 예측하면서, 가장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결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 미래의 결과에 대한 확실성은 전연 결정자의 몫이 아닙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전연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도서 7:14), 그래서 인간이 무엇을 결정할 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기도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꼭 기도해야만 합니다. 진로문제(학교를 선택한다든지, 직장을 결정할 때), 결혼문제(배우자 결정), 사업문제(무슨 일을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할까?) 등등, 미래의 좋은 열매를 기대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미래의 결정권자인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자의 삶입니다. 개인 일이나, 가정사나, 교회 문제나, 국가나, 더 나아가서 세계를 향한 비젼을 갖는 일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결정해야만 합니다. 나의 중요한 미래사를 결정할 때에 부모 형제도, 선배도 스승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하는 방백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다(시편 146편)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진가가 그가 행한 일 자체에있는가, 아니면 인간 자체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천문학은 인간의 미소함을 입증할 수 있어도, 인간은 역시 천문학자이다” 인간이 하늘에서 작지만, 그러나 그 하늘을 향하여 우리는 대담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좋은 결과의 결정으로 교만해서도 안되고, 또 결정을 잘못 내려서 실패의 인생이 되었다고 자신을 자학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성공이나 실패가 주는 그 의미와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 내일의 좋은 결정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나의 결정이 귀한 것일 뿐만아니라, 나 자신이 더욱 귀한 존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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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聖女) 데오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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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경, 홀아비로 사는 한 남자가 깊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믿음 좋은 딸이 있었는데 딸과 함께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으나 그 수도원에는 여자는 들어 갈 수 없는 남자들 만의 수도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딸이 남장을 한 채 부녀는 수도원에 들어 갔습니다. 아버지는 수도에 전념하고 딸 데오도르는 빨래와 요리등 수도원의 제반 일들을 도맡아 했습니다. 얼마후 아버지는 나이 많아 돌아가셨고, 그 후에도 데오도르는 여전히 수도원의 일들을 계속하였습니다.
수도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여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 여관집 딸이 방탕하여 어느 군인과 놀아나다가 임신을 했습니다. 여관집 딸이 “어쩌면 좋아요 이 사실을 아버지가 아시면 날 죽일 거예요” 여관집 딸이 겁에 질려 그 군인에게 애원하자, 그 군인은 퉁명스럽게 “곤란하면 이곳을 지나는 미남 수도사에게 강간당했다고 하면 해결되지” 했습니다. 딸은 그 군인의 말대로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아버지는 수도원에 찾아가 행패를 부렸습니다. 결국 데오도르가 누명을 쓰고, 실컷 매를 맞는 중, 데오도르는 ‘어쩌면 우리 수도사 중에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발각되면 쫒겨날 뿐만아니라 정말 타락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자 수도사로 분장한 데오도르는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덮어 쓰고 수도원을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쫒겨난 그녀는 수도원 앞에 거지가 되어 “불쌍한 죄인입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앉아 있었습니다. 누군가 먹을 것을 갖다 주면 먹고 없으면 굶었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그렇게 참회하며 지내자 수도원 원장은 용서를 해주었고 그녀는 다시 수도원에 들어가서 죄인이라는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으며 그 수도원의 가장 하찮은 일들을 하며 지내다가 워낙 많이 굶은데다가 일이 많고 힘들어 일찍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수도사들이 죽은 데오도르의 시신을 장례코자 시신을 씻기고 염을 하면서 감짝 놀랐습니다. 여자가 아닌가! 비로서 그녀가 모든 것을 덮어 쓰고 치욕의 고난을 당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수도사들은 그녀에게 너무 심히 대했던 것을 뉘우치며 수도원 전체가 큰 회개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녀를 성녀(聖女) 데오도르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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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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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버 포웰의『성경 유리창』이라는 책에서 유서를 남기지 않고 죽은 한 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부자가 어느날 죽었다. 그가 죽자 그 집의 가구들이 경매에 붙여졌는데, 그 때 사람마다 좋은 물건을 살려고 관심을 집중 시켰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거드떠 보지 않는 부자의 죽은 아들의 초상화를 사들이는 한 여인이 있었다.‘왜 그런 그림을 사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그녀는 자신이 수년 전에 그 소년의 유모였는데 그를 무척 사랑했다고 그래서 그림으로서는 그렇게 잘 그린 명화는 못되지만 소년을 사랑한 나머지 잊지 않을려고 그림을 샀노라고 대답했다. 그 초상화를 산 그 여인은 경쟁자 없이 싸게 산 그 그림을 유심히 여기 저기 잘 살펴 보다가 그녀는 그림 뒤 속에서 한 서류 뭉치를 발견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열어보니 그것은 바로 부자의 유서였는데 그 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자기 아들을 가장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 준다」는 유서의 내용이 써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인 그분의 초상화 뒤에는 어떤 서류 봉투가 있을까?
그 봉투에도 분명 자기의 아들을 사랑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넣어져 있으리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
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마태복음 16: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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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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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면 6.25 동란이 있은지 60해가 되는 날입니다. 6.25 동란 때에 있었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6.25 동란으로 어수선하던 어느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 날, 의지할 데 없는 만삭된 부인이 평소에 알고 있던 한 선교사에게 해산의 도움을 받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저 멀리 선교사의 집이 보이고 조그마한 다리가 계곡을 가로 질러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점점 심해오는 진통으로 더 이상 걸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겨우 다리 밑으로 내려간 부인은 옥동자를 낳았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일듯 휘몰아치는데 갓 태어난 아기에게 덮어 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부인은 자신이 입었던 옷을 하나 하나 벗어서 갓난 아기를 포근하게 감싸 주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지칠대로 지친 부인은 아기를 끌어 않은 채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온다던 여인을 기다리다 못해 집을 나선 선교사 부인이 다리를 건너가고 있을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냘푼 아기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고, 마침내 누더기 속에서 배고파 울고 있는 갓난 아기와 얼어 죽은 사랑스런 젊은 어머니를 발견하였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아기를 데려다가 돌봐 주었고, 이 아이는 무럭 무럭 자라났습니다. 12살이 되는 생일이자 크리스마스 날, 이 아이는 선교사 부부로부터 자기가 어떻게 이 집에 오게 되었는지 듣게 되자 어머니 무덤에 데려가 달라고 졸랐습니다. 무덤에 도착하자 무덤 곁에서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며 소년은 입고 있던 옷을 하나 하나 벗어 무덤을 덮었습니다. 눈속에 꿇어 앉아 떨면서 소리쳐 울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저 때문에 얼마나 추우셨어요? 그때는 이보다 더 추우셨지요? 어머니, 어머니 ....”
젊은 부인이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그처럼 사랑하여 자신의 죽음을 돌아보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서 49장 15절에 기록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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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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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계속 활동하신 40일 동안, 예수님이 다니시던 곳곳마다에는 부활의 흔적이 남겨졌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평안할지어다" "성령을 받으라"라고 축복을 하셨습니다. 고기잡이로 밤을 지새웠지만 헛수고한 제자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시며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내리라 하여 단번에 고기 153 마리를 잡게 해주시는 주님의 이적을 보게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제자에게도 나타 나셔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남겨주셨습니다. 의심하고 있는 도마에게도 부활의 주님은 그의 못자국을 보여 주시면서 부활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흔적을 우리의 생활에서 남겨야 할것입니다. 우리가 남겨야 할 그리스도인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의 흔적입니다. 동물은 자기의 냄새를 남기며 돌아다니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나기려고 애쓰는데, 우리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십자가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백이 우리의 신앙을 튼튼하게 합니다. 우리들은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고난주간에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자랑이요, 전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만이 예수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 죽음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죽음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 나는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 십자가 만을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칭찬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신앙인은 예수의 흔적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활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부활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의 흔적을 전하는 것입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찾아오셔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 우리가 찾아가서 이 진리를 전해주어 들어야 할 자는 누구입니까?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으로, 또 창조적이고도 능력있는 삶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매일 죽는 십자가의 삶은 매일 다시 사는 십자가의 권능으로 승화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고, 이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재림의 주를 맞이할 그때, 우리가 내 보일 것은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는 그때 우리가 남긴 예수님의 흔적은 우리에게 상급으로 환산해 주실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인 예수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우리의 상급이요, 장차 받을 면류관인 것입니다.
셋째로 재림신앙입니다. 예수의 재림을 놓고,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의 생을 마감하는 죽음과도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생을 마감해야하는 날이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우리의 욕망이 재물에 있겠습니까? 출세에 있겠습니까? 세상 학문에 있겠습니까? 세상 즐거움, 엔죠이하는 일 이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오셔서 행하실 심판대 앞에서의 나의 모습을 예측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 만큼 자신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가장 적라나하게 주님의 저울 위에 올려 놓아 보십시오. 어떤 상을 받기에 마땅할른지를 가늠해 보십시오. 우리는 재림의 신앙, 아니 종말적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전했습니다. 우리도 주의 재림을 대망하며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도 초대교회의 성도와 같이 주의 재림을 전하며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복음을 전해야할 것입니다. 전도자가 따로 있습니까? 선교사가 따로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전도자요, 복음을 위해 사는 성도가 선교사가 아니겠습니까? 주님 오신날 무엇을 내놓겠습니까? 저금통장입니까? 학박사증이겠습니까? 아니면 세상 지위나 세상 명성이겠습니까? 주님 오시는날 쓸모없는 것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걷우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영생을 거두는 일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라고 당부하신 예수의 흔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재림의 주를 바라보며 복음으로 심어 영생을 거두는 일에 생의 목표를 두고 전진하십시오. 성령이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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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앞에 설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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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기도 용인군 시골 한구석에서 20여년 동안 목회하시던 모 목사님께서 60세 조금 넘어서 일찍 은퇴를 했습니다. 그는 꽤 성공한 목회자였습니다. 성도 7,8명 밖에 안되는 교회에서 생계를 위해 닭도 길러보고, 염소도 키워보다가, 실패도 여러번 했는데, 지금은 돼지가 7-8백마리요 소가 수십마리며 농토도 꽤 가지게 되었고, 교인들도 장년만 200명이 넘게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해서, 주위 목사님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좀 편히, 여유있게 목회할만한데 은퇴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은퇴를 하시나? 그분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너 최목사야 세상에서 무엇하다가 왔느냐?” 라고 주님께서 물으실 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돼지 키우다가 왔습니다.” 라는 대답 밖엔 할 수 있는 말이 없으니 이제 부터라도 주님께 내놓을 만한 일을 좀 하려고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진지한 대답에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동역자들은 생각했습니다.“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주님이 오셔서 “너 세상에서 무엇하다가 왔느냐?” 하시면 무엇하다가 왔다고 해야 할가? 우리 모두 생각해 볼 일이요. 주님께서 내게 그렇게 물으실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한손에 면류관을 들고 “내가 이것을 네게 주려고 하는데 이 면류관을 받을 만한 일한 것을 내놓으라”고 하실 텐데, 그때 내가 내놓을 것이 무엇일가? 공부하다가 세월 다보냈습니다. 하며 박사증을 내보일까? 장사하면서 돈좀 벌었습니다. 하고 저금통장을 내놓을까? 골프치다가 빈손으로 왔습니다. 할까? 짧은 인생, 무엇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과,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는 길일까?
모세는 시편 90편에서 짧은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날아가듯 흘러가는, 짧은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살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모세의 기도는 귀한 기도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많은 경우에 세상 물질과 연결되어 있고, 세상 권세나 명예, 부귀 영화를 꿈꾸는 것인데 비해, 모세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다가 칭찬을 들었고,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 영화까지 받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야고보서 1장은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세상살이에서 필요한 것중 하나님께 구하되, 꾸짖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후히 주신다고 한 것이 지혜 뿐인 것 같습니다. 지혜가 그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지혜, 하나님의 뜻을 감지하는 지혜, 자기 삶의 날수 계수함을 아는 지혜, . . . .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 앞에 설 때의 자기 모습을 생각하며 살게 됨니다. 우리, 우리에게 구원받은 감격은 큼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상급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면류관을 받아 쓸 것을 상상해 보면, 가슴이 부풀어 오릅니다. 어떻게 살아야, 면류관의 주인공이 될까?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라고 하면서, 이렇게 권합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것이 면류관을 받는 조건인 것입니다. 비 진리인, 허탄한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예수님처럼 고난을 극복하고, 말씀 전파로 전도인의 일을 하며, 직무를 다해 면류관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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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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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는 주파수라는 것이 있고, TV에는 채널이라는 것이 있어서 소리도 듣고 스크린에서 화면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귀에도 이런 채널이 있는가 봅니다. 경제인은 경제인끼리 거래가 잘 이루어지고, 정치인은 정치인끼리 의사 소통이 잘됩니다. 종교인은 종교인끼리 대화를 나누어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대화의 장이 펼쳐집니다. 또한 학생들은 학생들끼리 잘 통하는 말이 있으며, 어린 애들은 그들만이 통하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의 세계에서도 역시 사람인고로 하나님의 말보다 사람의 말이 훨씬 잘 통하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의 말로 하늘의 진리를 선포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그것 마저도 사람들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 이야기가 아닌, 세상살이 이야기를 사람의 속성으로 사람의 말을 할 때, 그 말은 아주 잘 알아 듣습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태어나, 예수님 앞서,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하며 살았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요 성령으로 세례를 줄 자요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푸는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 . . 그러나 사람들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인정을 하면서도, 그가 소개하고 있는 예수가 오셔서 직접 말씀하실 때에는, 그를 인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참 우둔한 인간의 심리입니다.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암기하면서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생의 근원인 그분에 대해서는 배척을 하니 참 딱한 노릇입니다.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왜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소개하는 사람은 인정하고 믿으면서, 진짜 주인공은 배척하고 죽이려 하니 이런 모순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게 바로 채널을 땅의 소리에다만 맞춰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인 까닭입니다. 예수를 소개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예수를 못 만난 사람이 있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면서도 예수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소개해 놓은 책이요 그곳에서 당신은 예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 소리만 들려오는 채널을 하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채널로 바꿔 맞춰 보십시오. 분명히 하늘의 음성,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이는 배척을 하고, 사람의 이름으로 오면 영접해주는 사람들이의 우둔한 심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너무나도 묘한 일입니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 지혜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가장 멍청한 가운데 빠져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한 청년이 영생을 얻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 청년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나라“ 청년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듣고 기가 막혔습니다.” 예수님 세상에 한번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 날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리이까? 그 일이 어찌 가능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책망조로 그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세상의 선생으로서 그것도 모르느냐?” 한심한 일입니다. 너무 무지합니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조건 믿으라. 는 말입니다. 유치원 다니는 딸이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애기는 어떻게 생겨나요 . . . . ” “응 너도 이다음에 엄마가 되면 애기 날수 있다” “어떻게 ?” “응 그렇게 알고 있어 ? 우리 아기 착하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끝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착한 인간이 되라고, . . . 영적 지각이 발달하고 성숙한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 되면 알 터이니 지금은 그냥 믿으라고, . . .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한 청년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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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훈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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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바뀔 때마다 TV나 신문에서 뉴스를 보면, 권력에 숨겨졌던 비리가 파헤쳐지는 것을 봅니다. 욕심이 만든 죄의 결과나, 권력의 남용에서 오는 일들을 접하게 됩니다. 권력의 그늘에 숨겨졌던 일들이 드러나서 알려지자 백성들 중에는 괜히 신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고, 통쾌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마음을 훈훈하게 적셔주지 못하며, 삶에 부요함을 주는 이야기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 훈훈한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아이들 스무 명에게 빵을 하나씩 나누어준 어느 빵집 주인의 이야기 입니다. 빵집 주인은 아이들에게 빵을 담은 바구니를 내밀면서 “이 바구니에 들어있는 빵을 한사람이 한 덩이씩만 가져가되 매일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은 앞을 다투어 제일 큰 빵을 차지하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들은 바구니에서 큰 것부터 골라가느라 정신이 없어서 빵집 주인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 한마디도 하질 않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옷이 허름한 차림의 한 소녀는 다른 아이들이 다 집어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바구니에 남아있는 제일 작은 빵조각을 집어 들고는, 주인의 손에 입을 맞추고 “고맙습니다.”하는 인사를 하고는 웃음을 띠며 집으로 갔습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이 소녀의 어머니가 빵을 자르는데 그 속에 은전 몇 닢이 들어있었습니다. 소녀는 그 돈을 빵집 주인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야 착한 아이야 내가 잘못해서 그 돈이 들어간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서 제일 작은 빵 속에 그것을 일부러 넣은 거야....”라고 하면서 그 은전과 다른 빵 하나를 더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엔 이기주의로 인심이 각박해져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며 다른 사람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스럽게 여겨지고, 약삭빠르게 앞지르고, 가로채는 사람이 똑똑한 것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세상에, 바보스럽게도 보이는 이 순진한, 한 소녀의 양보하는 이야기는 우리네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 줍니다.
언젠가 뉴스에, 개한마리가 술 취한 주인을 밤새껏 지키며 보살펴 주어서 주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뉴스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개 주인에게 그 개를 500만원에 팔라고 제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어려운 경제적 상황 속에서도 그 개를 절대로 팔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개 같으면 50만원을 받아도 좋은 금액인데, 그 금액의 10배를 준다고 했는데 왜 안 팔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개의 동물적 육체인, 몸값 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은 얼마짜리입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고귀한 정신과 영혼이 있으매 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49편 20절에도 인간의 존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우리 인간에게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을 찐대 우리는 존귀한 존재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적음이 기준이 아닙니다. 학식의 유무도 아닙니다. 사회적인 지위와도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잘잘못을 깨닫고, 인간의 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깨달음이 없으면 짐승 같다고 했습니다. 직설적으로 표현해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 물에 쓸려, 뭇 동물과 같이 죽음을 면치 못한 인간들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 창세기에서 봅니다. 동물처럼 영원한 형벌로 망할 인간들을 향하여 노아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큰 비가 내릴 터이니 이배에 타라고 했을 때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비웃던 사람들은 결국 다 물속에서 비참한 인생을 마쳤습니다.
세상 말세에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또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노아 때와 똑 같이, 멸망할 짐승과 같이 무가치한 존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절기가 대림절(11월 29일 - 12월 20일)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사랑의 두 팔을 벌리고, 우리가 그의 품에 안기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영원한 삶의 길인 그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언제나 훈훈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또한 영원한 면류관의 주인공으로 살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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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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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워 본다면, 첫째, 그곳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 있습니다. 쓸데없이 존재하는 사람, 필요없는 사람, 일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람, 방해군, 등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항하던, 당시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너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 ” 하며 지적한, 열두 제자 중에, 가롯 유다도 이 부류에 속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있어서는 안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있어선 안될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지곤 합니다.
둘째는 본전 타입의 사람이 있습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의 사람인 경우입니다.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형성된 단체나 사회는 결코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힘이 없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마치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책망한 한 종과 같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이 게으른 종의 생각은 “이것 하나마저 잃어버리면 어떻하나” 하며, 주인이 준 그 한 달란트를 잃을까봐 땅에 묻어 두었다가 한 달란트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 주인은 노했습니다. 미련한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종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남에게 큰 해를 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한심한 인간입니다.
세번째는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꼭 필요한 사람, 없어서는 않될 사람을 말합니다. 신문 구인 광고를 보면 그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의 자격을 제시하며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꼭 필요한 사람이 있어야 할 곳에 그 사람이 있는 단체가 발전합니다. 사회나 국가도 마찬가지이며, 우리 교회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그곳에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 꾸준히 창조적인 일을 할 때 발전과 부흥이 이룩될 것입니다.
어떤 지위나 직책에 따라, 필요한 사람이냐 그렇지 못한 사람이냐가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루를 살아도 꼭 필요한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이었느냐에 따라서 시대의 역사는 결정됩니다. 시대적 운명도 탓하고, 환경도 원망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이런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은 하나님께서 주신 힘입니다. 이 힘을 경험하고 놀라운 역사를 이룩한 성경 속의 한 인물인,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 .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좇아가노라. . . 하나님의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 .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꼭 필요한 사람의 요건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구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능력주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피곤한 인생길, 답답하고 외로울 때, 막막하고 앞이 캄캄할 때, 어디로 가야 될지, 누구에게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황막한 광야 같은 세파 속에서 내게 능력 줄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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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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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당신에게 꼭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1] 돈 :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꼭 필요하고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이 돈입니다. 돈이 없으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일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돈이란 정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돈을 사랑합니까?
[2] 건강 : 돈이 아무리 많다해도 건강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많은 돈을 가진자라도 건강을 잃으면 다 귀찮아지는 법입니다. 이 세상에선 건강한 것이 무엇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건강에 좋은 것이라면 외국까지라도 가서,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먹으며, 별의 별 건강식, 혹은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3] 교육 : 지금은 지식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입니다.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얻습니다. 그런데 돈 많고 건강한 바보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습겠지요? 많은 지식은 힘이요 이 힘은 다른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됩니다. 그래서 학위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 교육열에 대한 부모의 관심이 대단합니다. 그러고 보면 교육도 중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4] 지위 :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적게는 가정이란 사회에서 살고, 직장, 교회, 이웃, 그리고 국가, 넓게는 국제사회에서 살고있습니다. 이런 자기가 처해있는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존재 평가가 달라지고 이에 따르는 여러가지 이익도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돈과 건강과 교육, 그리고 사회적 지위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얼마 동안이나 필요하고 유익합니까? 나의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 뿐입니다. 더욱이 이런 중요한 것들이 나의 죽음을 해결하는데 무관하다는 것을 우리 인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전연 무용지물 들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믿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1:1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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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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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9장 24절에 보면, “운동장에서 다름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했습니다. 우리의 상은 무엇 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늘의 상이라고 했습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말한 것 처럼 하늘의 상을 위하여 세상 영광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이 걸어 가신 길 만을 쫓아 따라 갔습니다. 이 하늘의 상,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을 계속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다름질 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느니라.” 즉 하늘의 상을 위해서 우리는 두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목표요, 다른 하나는 절제입니다. 우리 인생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목표란 무엇입니까?
목표는 우리의 마음 가짐입니다. 마음 가짐은 사람의 기본 자세에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우리 몸가짐의 기본 자세는 진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가 진실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목표 입니까? 남에게 보기기 위한 목표입니까? 아닙니다. 목표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의 설정입니다. 그래서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하신 하나님의 평가에서 합격하여 면류관의 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목표는 정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흘들리는 목표나 목표 없이 뛰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운동에는 우승의 목표가 있고 여행에는 여행의 목적지가 있듯이 우리의 삶에도 정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목표가 없이는 적극적일 수도 긍정적일 수도 없습니다. 그 목표가 흘들리면 자세도 엉클어지고 삶의 의미도 잃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극히 유동적이고 불안전한 것에 목표를 둡니다. 예를 들면 돈이나 명예나 사람에게 전적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이런 것에 의존하는 사람의 삶은 안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것이 삶의 한 방법이라면 몰라도 목표가 된다면 그만큼 실망도 크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흔들리지 않는 진리 위에 두어야 합니다.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이것이 인생이 가야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기본 자세이고 진실의 안내자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이야말로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분명히 변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히 13: 8) 꿈을 꼭 실현하고 성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요. 그분이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보호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생의 목표를 둔 사도 바울은 노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느니라.”
러시아워 시간에는 거리가 무척이나 복잡합니다. 각종 차들은 길을 따라 저마다 바쁘게 달리고, 길가의 사람들도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사람도 차도 모두 자기들이 원하는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쁘다 바쁘다” 하며 분주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바쁘고 그 바쁨이 무엇을 가져오는 것인가? 면류관일까? 아니면 헛된 세상낙인가? 인생의 희비애락을 박넝쿨에 두었던 요나처럼 당장 앞에 있는 일에만 우리의 관심의 전부라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하여 면류관을 예비하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에 있다. 앞에는 언덕이 있고, 내(川)가 있고, 진흙도 있다. 걷기 좋은 길도 있고, 걷기가 힘든 길도 있다. 그러나 꾸준히 가야한다. 마치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 없는 것처럼 고난을 이기면 행복과 영광은 온다”라고 했습니다. 그렀습니다. 풍파는 오히려 목표를 가지고 전진하는 자의 것입니다. 하늘 면류관에 우리의 목표를 둔 사람은 십자가를 사양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면류관의 공급처입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면류관은 십자가 맨 위에 걸려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볼 때 면류관은 환히 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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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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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지방에 랍비들의 가르침에 보면 “돈을 보관하는 데 제일 좋은 장소는 땅속이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유난히도 전쟁 위험이 많았던 팔레스틴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보관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크게 변치 않는 땅이었던가 봅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사람들은 항아리에 돈을 저축했습니다. 넣기만 하고 다시 꺼낼 수 없는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그 항아리가 가득 찰 때까지 돈을 넣기만 하다가 가득 차면 그 항아리를 깨고 돈을 꺼내어서 그 돈으로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돈을 땅이나 항아리에 보관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은행에 맡기며 필요할 때에 찾아 씁니다. 그런데 많은 돈을 가진 사람들은 돈을 은행에 맡겨 놓고 그 이자나 취하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돈으로 더 많은 돈을 벌려고 고민하며 동분서주 합니다. 그런가하면 돈을 너무 많이 가진 사람들은 돈의 위력을 발휘하며 살려고 합니다. 그들은 황금만능주의의 깊은 늪에서 황금의 검을 휘둘러 댑니다. 그 칼에 다치는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 칼에 찔려 죽는 사람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 칼 앞에 굴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필요의 욕구가 아닌 정복의 쾌감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에 웃고, 돈을 즐기며, 돈에 묻혀살다가 돈 때문에 자자손손이 치욕거리가 되거나, 아주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그 좋은 예는; 한국의 전직 세도가들을 비롯해서 우리 주변에서 찾기에 너무 쉽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저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 뿐이겠습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돈을 좋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돈으로 자신의 대부분의 필요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으면 굶주린 배도 채울 수 있고, 부모님께 효도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비싼 선물을 사줄도 수 있고, 자식들이 기회만 있으면 졸라대는 좋은 차도 살 수 있고, 내 집도 마련하여 정원도 꾸미며 애완 동물을 기를 수도 있고, 철따라 관광 명소를 찾아 여행도 즐길 수 있고, 명절에 신세진 사람들에게 멋진 선물로 은혜도 갚을 수 있고, 가난한 유학생의 학비도 도울 수 있고, 어려운 교회에 선교비도 보낼 수 있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조국의 동포도 도울 수 있고, . . . . . . 돈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네 있습니다. 돈으로 할 수 없는 것,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생명입니다. 생명!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인 생명인 것입니다. 돈은 인간이 만들었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돈이 인간의 조직과 제도 속에서 그 위력을 드러내지만, 하나님의 영역에 있는 생명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자가 없느니라.”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무지 속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게는 이 영원한 생명이 대수롭지 않게 보이게 마련입니다. 인류 문명의 발달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데서부터 비롯되었는데, 예수를 빨리 발견하는 사람은 기뻐할 날이 그만큼 일찍 옵니다. 그것은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 얻은 자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로 삼으시고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거룩한 영을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영생을 확신하며, 구원에 이른 기쁨과, 또 천국을 꿈꾸며, 소망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소중한 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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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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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온갖 기술과 정성을 쏟아, 나무를 자르고 돛을 달아 예쁘게 배를 만들었습니다. 소년은 완성된 배를 강물에 뛰었습니다. 강물에 뜬 배는 훌륭했습니다. 소년의 가슴은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강 한가운데서 급한 물살에 휩쓸려 강 하류 쪽으로 떠내려가는 것이 아닙니까! 소년은 강을 따라 힘껏 뛰었지만 배는 이내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애써 만든 배를 잃은 소년은 며칠 동안 강가를 뒤졌지만 배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주일이 지난 어느날, 소년은 어느 상점의 진열장에 놓여 있는 자기의 배를 발견했습니다. 조금 망가지긴 했지만 소년이 만든 배였습니다. “아저씨, 저 배는 제것입니다. 제가 만든 거예요.” “얘야, 좀 안됐지만 사실은 오늘 아침에 어떤 사람에게서 저 배를 샀단다. 네가 만일 저 배를 꼭 가지고 싶다면 27불을 주고 가져가거라.” 했습니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가지고 있던 돈을 모아서 그 배를 다시 샀습니다. 상점 문을 나설 때 소년은 말했습니다. “이제 너는 다시 내 것이 되었구나. 처음에는 내가 너를 만들었고, 이제는 값을 주고 산거야.” 배를 다시 찾은 날, 소년은 배를 가슴에 안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정성어린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 하셨습니다(창1:26, 27).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잃어버린 배와 같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사단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우리가 원치 않는 죄를 범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우리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찾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다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 품에서 사랑 받으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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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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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반도인 북 구라파는 여름이 되면 밤이 거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곳의 여름은 낮이 매우 길고, 겨울은 정 반대로 밤이 길고 낮이 짧습니다. 따라서 겨울에 태양을 볼 수 없는 최 북단에서는 여름이면 태양 빛을 쬐는 것이 일과 중의 하나입니다. 한 낮에 벌거벗고 ㅤㅎㅐㅊ볕을 쬐는 걸 보면, 왜들 저러나 하고 의아스럽게 생각되지만 그 연유를 알고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름철에 일광욕을 잘 해두지 않으면 겨울철에 생명까지 위협을 받을 수 있는 피부병에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구의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등의 나라에서는 국가 정책으로도 여름 휴가철엔 국민들을 남쪽 지중해 지방으로 내려보내고 있습니다. 피서가 아니라 몸 태우기 위한 작전입니다. 국민보건 위생상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스톡홀름에 가 있는 우리나라 대사관의 무관으로 있는 한분의 자녀들이 한국식으로, ㅤㅎㅐㅊ볕에 얼굴이 탈까봐 첫해를 그냥 보냈다가 그 이듬해 무서운 병으로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의 태양은 겨울을 대비하는 예방약이요, 월동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곳 사람들 뿐만 아니라, 온 인류에게 태양빛은 참 고마운 보배입니다.
태양 이야기만 나오면 저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디오게네스가 생각납니다. 그는 청빈하게 통나무 집에서 살았던 철학자입니다. 디오게네스가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을 즈음 출세욕에 부풀었던 알렉산더가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나 외에 누가 더 존경을 받을 수 있느냐 ?’는 시샘이 나서 수소문 하여 그를 찾아 갔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만났을 때에 그는 마침 통나무집 밖에서 태양빛을 쬐고있는 중이었습니다. 대왕이 보기에는 측은하게 여겨졌습니다.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를 향하여 말 위에 올라탄 채 앞에 서서 몇마디 말을 건넵니다. “돈이 필요하냐? 아니면 이 땅의 절반이라도 줄 터이니 무엇이든 원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침묵이 좀 흐른 후 그는 말 위의 알렉산더를 뚜러지게 응시하고는 손가락으로 조금만 비켜서라는 시융을 한 것입니다. 태양 빛이 가리워져 그림자가 저서 춥다는 말입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따사하고 아름다운 태양 볕 뿐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권세도, 나라의 절반도,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태양볕, 그 외에는 아무런 더 이상의 욕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대왕은 속으로 몸둘 바를 모르고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오늘 날도 빛을 잃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디오게네스 처럼 빛을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빛을 잃은 사람들이 빛 대신에 돈으로 세상을 밝게 하려다가는 실패합니다. 빛 대신 지식이나 과학으로 세상을 얻으려다가는 실패합니다. 빛 대신 인간의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다가는 실패합니다. 빛은 어두움을 정복하고 길을 안내합니다. 이 세상의 영원한 빛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나는 세상에 빛이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4-16> 우리의 영원한 태양 빛이신 예수님에게서 빛을 받은자, 먼저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은 자가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추는 빛을 보고 세상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찾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자가 빛되라 하신 말씀에 따라 살지 못하면, 무엇이 세상을 밝게해줄 수 있습니까? 유교의 공자입니까? 이르람교의 마호멧입니까? 절간의 부처입니까? 점쟁이 무당입니까? 인도의 소입니까? 그것이 빛을 발하여 세상을 밝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할 세상이라고 저주만 하면서 세상을 바라만 보고 있으라고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어두운 세상을 빛 가운데로 인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광명을 보았으며, 그 광명 아래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빛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 광명아래서 안식만 하며 엔죠이 하고만 있지 말고 어두운 세상으로 가서 빛되라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며, 우리 주님께서 부탁하신 빛의 사명을 다하면서, 재림의 주를 대망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늘의 칭찬과 상급과 면류관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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